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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기록 - 1

시스템은 겁주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답에 따르지 않으면 당신은 곧 에러를 일으킨다'는 경고가 도처에 깔려 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그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경고에 쉽게 겁먹는 학생이었다. 나의 4년은 눈을 내려 깔고 에러를 일으키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시간이었다.

4년 후에, 운이 좋았던 나는 꽤 괜찮은 대학교에 입학하여 매우 뛰어난 동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땅에서 만난 그들은 내게 ‘파란색 피카츄’ 같은 존재였다. 그들에게는 이 시스템의 경고가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모두 다른 형태의 신념과 고민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을 실제로 행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들은 가르침을 주는데 매우 열려 있었다. 나는 무료로 그들의 눈을 빌리고, 뇌를 빌릴 수 있었다.

그렇게 들여다본 세상은 내가 알던 것과 너무 달랐다. 어떤 사람은 중학생쯤부터 하던 공부를 지금까지도 하며, 거의 모든 주말에 48시간(혹은 24시간) 동안 대회를 했다. 어떤 사람은 인기도 없는(그 당시에는 주변에 AI 공부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AI 논문을 프린트해서 매일 읽고 있었다. 심지어 페이스북 페이지, 오픈 카톡방을 만들어 자신이 배운 것을 공유했다. 어떤 사람은 과 동아리의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학회로 만들어 학교 전체에 공개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어떤 사람은 창업을 도전했다. 어떤 사람은 교환학생을 간다며, 나에게도 가자며 3년 내내 설득했다. 그 당시 나의 눈에는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시스템의 경고를 무시하는, ‘굳이’ 혹은 ‘에러’로 보였다.

시간이 아주 조금 흘러서 그들은 자신 위에 떠 있던, 내 눈에만 보이던, 경고창을 스스로 지우기 시작했다. 동경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경로를 벗어났다고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지내온 2n년은 실은 보잘것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합리화와 합리화하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 그 둘 간의 전쟁을 지켜보던 중, 친구의 권유(사실상 대리 지원)로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다. 이 선택은 내게 가장 두려운 선택이자, 시스템을 우회하는 인생 두 번째 선택이었다(첫 번째는 의대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덜컥 가버린 미국에는 또 하나의 갈라파고스 제도가 있었다. 인종, 언어, 문화, 사고방식, 물가, 자유의 농도, 모든 것이 달랐다. 온천지가 나와 다른 세상을 접하고서, 비로소 ‘다름’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았던 경고창들은 항상 내게 다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나의 세상은 온통 남들이 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들이 시작하면 시작했다. 그만두면 그만뒀다. 포기하면 나도 포기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내게 아무런 제약도, 시스템도 없었다. 그래서 마음대로(?) 생각하고, 살기 시작했다. 대단한 것들은 전혀 아니었고, 그저 한국에서의 나였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대화도 잘 안되는 학교 취업센터에 가서 “나 교환학생인데 일 좀 달라”고 하고(일을 받는 데는 실패했다), 날씨가 좋아서 수업대신 공원에 가는 등이었다(좋은 건가? 근데 이런 식의 클리셰를 평소에 좋아했다). 그렇게 약 6개월의 짧은 꿈을 꾼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참 신기했다. 돌아와서 바라본 세상에는 경고창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눈앞의 경고창은 마치 쌓인 먼지 같은 것이어서 후 불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나의 삶은 전과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이후 아주 이상한 직장에 몸을 담고 여러 존경스러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변화의 속력은 더욱 높아졌다.

이제는 나도, 나에게 한껏 겁을 주던 이 시스템에서 아주 작은 한 발짝 씩 발을 빼보고 있다. 발 디딘 그곳이 황무지인지, 불바다 한 가운데인지, 푸르른 숲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그곳에 두 발 다 내려 앉히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5-10년 정도 더 살아보면, “그때 내 말을 듣지 그랬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냥, 경고창을 끄고 5년 정도 더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5년 동안은. 황무지라면 씨앗을 심어가면서, 불바다라면 소화기를 뿌려대면서, 숲이라면 집을 지어가면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